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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정치

홀로도모르, 사라진 곡물 속에 묻힌 민족의 기억

by 율벚꽃 2025. 9.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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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굶주림’과 ‘죽음’이 하나의 말이 되었던 시간


1930년대 초, 우크라이나 평야에서 벌어진 대기근 ‘홀로도모르’는 단순한 기근이 아니었습니다. 곡창지대에서 수백만 명이 굶어 죽은 이 참사는 스탈린의 강압적 정책 속에 의도적으로 악화된 인재(人災)였고, 일부 국가들은 이를 ‘집단학살’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푸틴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비교해 보면, 역사적 반복이 어떻게 현재의 전쟁으로 이어졌는지 선명히 드러납니다.


‘홀로도모르’는 무슨 뜻일까?

‘홀로도모르(Holodomor)’는 우크라이나어로 ‘홀로드(holod, 굶주림)’와 ‘모르(mor, 죽음 또는 멸종)’를 합친 단어입니다. 단순한 대기근을 넘어, 민족 말살을 위한 체계적 폭력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으며, 우크라이나와 미국·캐나다·유럽 일부 국가들은 이를 ‘제노사이드(Genocide)’로 공식 인정하고 있습니다. 반면, 러시아는 이를 정치적 해석이라며 의도적 학살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희생되었나?

사망자 수는 정확히 특정하기 어렵지만, 현재 국제 학계에서 가장 널리 인용되는 추정치는 약 400만 명 전후입니다. 일부 연구에서는 250만 명 이하, 또 다른 자료에서는 500만 명 이상으로 보기도 하지만, 학계 및 국제기구는 350만~450만 명 사이를 일반적인 범위로 보고 있습니다.

구분  수치 및 설명
전체 사망자 추정치 약 250만 ~ 500만 명
평균 추정치 (국제기구 기준) 약 400만 명 전후
식인행위 유죄 판결 수 2500명 이상 (우크라이나 국립과학원 공식자료)

무엇이 이 참사를 만들었나?

기근의 가장 큰 원인은 스탈린이 주도한 ‘집단농장화 정책’이었습니다. 농민들은 땅을 빼앗기고 집단농장에 편입됐으며, 수확물은 국가가 전부 징발해 외국으로 수출했습니다. 곡물은 철저히 수색당했고, 파종용 종자까지 압수됐습니다. 특히 1932년부터는 농민들이 굶주림을 피해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는 것조차 법으로 금지되었습니다.

이러한 억압 속에서 우크라이나인들의 사망률은 급증했고, 1933년이 되자 대기근은 최고조에 달했습니다.


왜 우크라이나였을까?

우크라이나는 고대부터 “작물이 가장 잘 자라는 기름진 땅”으로 알려진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스탈린에게 이 땅은 잠재적인 ‘반(反)소련 세력’이 자라날 수 있는 위험 지역이었습니다. 독립적인 농민 공동체, 민족주의 성향의 지식인, 유럽과 가까운 지리적 특성은 중앙집권적 소련 체제에 위협이 되었고, 스탈린은 그 불씨 자체를 꺼버리려 했습니다.

그래서 대기근과 동시에 우크라이나 지식인·정치 엘리트를 숙청하는 이중적 탄압이 시작되었습니다.


홀로도모르는 어떻게 기억되었나?

소련 시절에는 이 사건이 철저히 감춰졌습니다. 학교 교과서에서는 홀로도모르라는 단어조차 사라졌고, 기근은 ‘수확 실패’나 ‘자연재해’로만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나 1991년 우크라이나가 소련에서 독립하면서 진실이 수면 위로 올라왔습니다.

현재 우크라이나는 매년 11월 넷째 주 토요일을 ‘홀로도모르 추모의 날’로 지정해 전국적으로 희생자를 기리고 있습니다.


스탈린에서 푸틴으로, 역사는 반복되는가?

스탈린이 우크라이나를 체제 위협 요소로 본 시각은 오늘날 러시아 정권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푸틴 정권은 유럽 지향적이고 민주화된 우크라이나가 러시아 국민에게 ‘왜 우리는 안 되는가’라는 의문을 던질 수 있다고 우려합니다. 이는 내부 불안을 유발할 수 있기 때문에,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의 독립과 민주화 자체를 체제 위협으로 인식합니다.


현대전에서도 반복되는 ‘선전 전쟁’

스탈린은 당시 라디오와 신문을 통해 우크라이나 상황을 철저히 왜곡했습니다. 푸틴은 소셜미디어와 전자정보를 무기로 삼았습니다.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이 어린이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가짜 뉴스, 반나치 전쟁이라는 침공 명분은 과거의 선전술이 디지털화된 버전에 불과합니다.


“우크라이나는 죽지 않았다”는 말의 무게

홀로도모르로 인해 사라진 세대는 많았지만, 그들의 저항 정신은 underground 운동으로 이어졌고, 결국 1991년 독립과 2014년 유로마이단 혁명으로 다시 세상에 드러났습니다. 우크라이나 국가의 첫 구절 “우크라이나는 죽지 않았다”는 문장은 단순한 애국 구호가 아니라, 살아남은 민족의 증언입니다.


우리에게 주는 교훈

역사는 과거에 머물지 않습니다. 강대국이 자국의 역사 해석을 무기로 삼아 군사적 침략까지 감행할 수 있다는 사실은 우크라이나 사태에서 여실히 드러납니다. 일제강점기 수탈을 겪은 우리에게도, 이 역사는 먼 타인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기억하고 대비하지 않으면, 비극은 형태를 바꾸어 다시 돌아올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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